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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4 12:29
오월항쟁 기간 방송활동에 대한 조사 결과
5·18기념재단은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압 직전에 있었던 ‘마지막 새벽방송’과 항쟁기간 동안 전개된 가두홍보방송의 진실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한다.
5·18기념재단은 지난 5월 17일자 한겨레신문 보도(기사제목 : “34년 만에 밝혀진 목소리의 주인공 ‘5월 항쟁 마지막 새벽 방송’ 김선옥 씨 - 세월호도 5·18도 잊으면 안 돼...우리가 우릴 지켜야죠...”) 후 마지막 방송 인물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이 제기되자 오월항쟁 기간 동안 방송활동의 진실규명을 위해 지난 6월부터 11월까지 5·18 당시 방송활동 관계자 구술채록, 당시 현장 음성파일 분석과 군법회의재판기록 및 개인진술조서 등 관련 문헌기록을 조사·분석하였다.
그 결과를 토대로 지난 10월 3일(금), 5·18기념재단 영상실에서 5·18 당시 방송활동 참여자와 당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관계자 1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월항쟁 방송활동 관계자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간담회를 통해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를 참석자들과 공유하는 한편 오월항쟁 당시 방송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참석자들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특히 오월항쟁의 마지막 방송에 대한 진실에 대해서는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는 정사(正史) 차원에서 관련 자료를 조사하여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재단은 오월항쟁 당시 방송 활동에 대한 관계자 구술채록 및 관련 문헌기록을 조사·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1. 오월항쟁 당시 방송반은 특별한 명칭이나 조직체계가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방송반이라는 명칭은 계엄군이 수사과정에서 수사편의상 임의적으로 편성된 것으로 파악됨)
2. 당시 방송활동은 가두방송과 도청 내 방송실을 이용하여 이루어졌으며, 가두방송은 주로 헌혈동참과 항쟁동참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차량에 탑승하여 확성기, 메가폰 등을 이용하여 진행하였고 도청 내 방송실을 이용한 방송은 도청 상황실에 접수된 내용이나 도청 앞 궐기대회 시 나온 각종 홍보사항 등을 방송하였다.
3. 가두방송은 초기(5.18~5.21) 전춘심, 차명숙 등이 주도하였으며, 이후(5.21~5.26)는 박영순, 이경희 등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되나 이외에도 많은 인원이 가두방송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4. 계엄군 철수 후 수습대책위원회가 활동했던 5.22~5.26까지 도청 내 방송은 주로 김선옥 등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5. 1980년 5월 27일, 마지막방송은 가두방송이 아닌 당시 전남도청 내 방송실 내부의 방송장비를 통해 새벽 2시경에 이루어졌다.(이 방송이 당시 전남도청 옥상에 있던 대형 스피커를 통해 광주시내에 울려 퍼짐)
6. 마지막 방송 문안은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위원장 김종배가 작성하여 이를 1980년 5월 27일 새벽 2시경, 방송실에 있던 박영순에게 전달하여 방송토록 지시하였으며 박영순은 건네받은 방송 문안을 새벽 2시경부터 3차례 이상 방송하였다.
7. 1980년 5월 26일 밤부터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진입해 올 때까지 당시 전남도청 방송실에는 박영순, 이흥철, 신원미상의 여중생 등 3인이 함께 있다가 연행되었다.
8. 마지막 방송 전, 1980년 5월 26일 밤부터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 방송실을 통한 다른 방송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우리재단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의 실체적 진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시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5·18 당시 사진, 영상, 음성 자료에 대한 발굴과 더불어 당시 가두홍보방송 차량을 운전한 운전사, 방송활동에 참여한 시민, 또한 5·18사진 속 주인공 찾기 등을 언론사와 함께 전개할 예정이다.
2014년 1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