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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5·18 ② 전남대 총학회장 故 박관현 열사
서슬퍼런 신군부에 화형 고했던 ‘광주의 아들’
‘민주화대성회’ 마지막 연설, 시민 결집 원동력 역할
내란죄 5년형 선고 … 옥중 단식 끝 스물아홉 생 마감
문대통령, 37주년 기념식서 호명 진상규명 의지 밝혀


1980년 4월4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온 박관현 열사가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오.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 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해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1980년 5월16일 옛 전남도청 분수대 앞 단상에 오른 20대 청년의 외침은 38년이 지난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다. 박관현(5·18 당시 27세)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광주시민들을 단시간에 사로잡은 그의 발언은 5·18민주화운동의 촉발이자 항쟁 기간 시민들이 보여준 자치공동체의 자양분이 됐다.

‘80총학’이라 불리던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의 반독재·반민주 투쟁은 5월 항쟁이 조직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근간으로 꼽히고 있다.

80년을 경험한 세대들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 3차례에 걸쳐 열린 민주화대성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시민들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다른 지역 학생운동과는 달리 광주시민들은 처음부터 80총학에 성원을 보내며 힘을 보냈다. 그 배경에는 박 열사의 인기가 한몫했다.

1953년 영광군에서 5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 열사는 법조인을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군 제대 후 3수 끝에 1978년 전남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동기였던 정용화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모시옷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독특한 친구”라고 기억했다.

같은해 학원자율화운동이 일었고 운동에 뛰어들었던 정 이사장은 구속, 양강섭은 무기정학을 당한다. 셋은 ‘학생의 사회운동 참여 여부’를 안주삼아 거의 매일 막걸리를 나누는 사이였다.

겉으로 학생운동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박 열사는 1979년 들불야학에 참여했고 이듬해 4월 전남대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선거 입후보를 권했던 윤한봉은 검정고무신을 신는 소박함, 스스로를 낮추는 예절, 정감있는 목소리 등 “거목이 될 소지가 있다”고 평가했다.

정 이사장은 “긴급조치 9호시대의 대학 현실을 보고 박관현이 친구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생겼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당시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맡고 있었던 최용주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박관현 열사는 뚜렷한 이목구비, 단단한 체구, 수월한 말솜씨로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며 “총학생회가 기획한 민주화대성회를 통해 광주시민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5·18 이전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민주화대성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횃불집회(1980년 5월16일)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야간집회였던 횃불집회는 광주시민들의 성원이 아니었으면 열리지 못했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도 평화적으로 진행한다면 제지하지 않겠다고 확답했다.

횃불집회는 총학생회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전두환·신현확·최규하 등 민주화를 가로막는 인사들을 화형에 처한다는 아이디어는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광주시민들은 5월 14∼15일 두차례 진행된 민주화대성회를 통해 박 열사를 ‘광주의 아들’로 여기고 있었다. 두번째 성회가 끝나기 전 박 열사가 말했던 ‘내일 다시 도청 앞에서 만납시다’는 약속을 지켰다. 5만여명이 도청 분수대 주변에 운집한 가운데 하늘로 솟은 10여개의 횃불은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바라는 광주시민의 염원을 대변했다.

하지만 ‘광주의 아들’은 5·18 때 광주시민과 함께하지 못했다.

5월17일 오후 5시께 서울에서 전국총학생회장단 회의가 경찰 급습으로 중단되고 다수 학생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즉시 대책회의를 열고 박 열사를 비롯한 집행부 일부는 피신하자고 결정한다. 이튿날 아침 박 열사와 만난 윤상원 열사(훗날 시민군 대변인)도 “일단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 너는 꼭 살아남아 학생들을 이끌어야만 된다”고 피신을 당부했다. 친한 선후배이자 학생운동의 분신이었던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박 열사는 여수에서 5·18을 지켜본 뒤 서울 이모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소금장사, 막노동, 섬유공장 생산직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다 1982년 4월5일 광주항쟁 수배자를 찾는다는 뉴스를 본 동료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됐다.

내란죄 등으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40여일 간의 옥중 단식 끝에 같은 해 10월12일 새벽, 전남대 병원에서 숨졌다. 공식 사인(死因)은 심근경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온몸에 난 고문 흔적을 본 사람들은 ‘단식으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신군부의 발표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

박 열사가 세상을 뜨기 직전 특별면회를 통해 만났던 최 연구원은 직감적으로 그가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을 느꼈다고 한다.

최 연구원은 “박관현 형은 같은 시기 수감됐던 IRA(영국령 아일랜드 무장단체) 지도자 보비 샌즈가 60일 단식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을 자주 말했다”며 “‘이 형이 굉장히 큰 결심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혹자는 말한다. 박관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박 열사는 5·18 때 광주에 있었더라도 계엄군의 제1호 체포 대상이 될 것이 불보듯 뻔했다.

‘민주화의 대부’ 고(故) 홍남순 변호사는 박 열사를 가르켜 “민주·민중·민족의 성스러운 항쟁이 독재의 총칼에 짓밟히는 동안 은신으로 비껴서야 했던 열사는, 민중의 자도자이기에 부끄럼없는 생활을 했고, 투옥된 이후에도 처절한 단식 투쟁으로 순국하던 그 순간까지 광주항쟁의 영웅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5·18 이후 광주항쟁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고통 받았던 박관현 열사는 지난 1998년 국립5·18민주묘지(1묘역 2-88)에 안장돼 5월 영령들과 함께 하고 있다.

민족통일과 민주화를 꿈꿨던 박 열사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18기념식에서 박 열사의 이름을 호명하며 5·18 진상규명 의지를 밝혔다. 지난 1996년 설립된 관현장학재단은 총 30명에게 장학금 1억5800만원을 수여하고 그를 기리고 있다.

“1982년 10월12일 3천만 우리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면 내 목숨을 바치겠다. 재소자 2천 명의 처우가 개선되도록 하였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소.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박관현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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